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독소 폴란드 점령 (문단 편집) == 결과 == 독일과 소련은 폴란드 점령기 동안 유대계 폴란드 시민을 상대로 [[홀로코스트]]를 자행했고, 폴란드계 시민들을 상대로도 [[카틴 학살]]과 강제이주 등 수많은 범죄를 자행했다. 폴란드계 시민은 대개 노예화와 추방의 대상이 되었지만, 유대계 시민은 그런 것도 없이 무조건 살해의 대상이 되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독일 점령지의 유대인과 비유대인 정책 간의 핵심적인 차이가 있다. 비유대인은 수탈과 노예화가 기본에 추방과 학살이 옵션이었지만, 유대인은 무조건 학살의 대상이 되었다. 물론 폴란드인들도 무조건적인 살해의 대상은 아니었다 뿐이지, 잔혹한 수탈로 수많은 사람이 굶어죽거나 병들어 죽었고 [[바르샤바 봉기]]과 [[카틴 학살]]처럼 무더기로 살해되었다.] 점령기 폴란드는 1939년 인구를 기준으로 '''18~22%에 해당하는 인구'''가 사망했으며[* 폴란드게 및 유대계 시민 한정. 1939년 당시 폴란드 제2공화국에서 폴란드계는 2,400만, 유대계는 330만 정도였다. 2차대전 당시 사망한 유대계는 최소 300만에 달하며, 폴란드계 사망자도 최소 180만~최대 290만에 달한다. 독일계, 우크라이나계, 벨라루스계 폴란드 시민의 사망률은 알 수 없지만, 이들 또한 점령 당국의 노예화와 학살 및 추방의 대상이 되었다. 참고로 이 희생자들 중 거의 '''90%'''가 군인이 아닌 시민들이였다.], 이는 인구 비율로 보았을 때 소련보다도 높은 비율이었다. 오늘날 폴란드에서 독소점령기는 과거 폴란드 분할에 버금가는 비극적 시기로 기억되고 있다. 독소점령기는 폴란드 내 반독, [[반러]] 감정의 근원으로 지목되고 있다. [[독일]]의 경우 1970년대 서독 총리였던 [[빌리 브란트]]가 바르샤바 게토 봉기 희생자 기념비에서 참배한 사건을 기점으로 과거사에 대해 적극적으로 사과하기 시작하면서 상당히 누그러진 편이지만, 옛 소련의 일원이던 [[러시아]]와 벨라루스의 경우 [[카틴 학살]]에 대한 지속적인 책임 회피 및 기타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의 정당화같은 망언으로 폴란드 국민들에게 반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특히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계기로 러시아가 노골적으로 패권주의적인 모습을 보이자 러시아에 대한 적대감이 극에 달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폴란드는 우크라이나에 적극적으로 군사장비를 지원하며, 동시에 러시아의 위협에 맞서 군비를 대폭 확장시키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의 [[폴란드 제2공화국]]은 현재 폴란드와는 상당히 달랐다. [[추축국]]과 맞먹을 정도의 반공 국가였으며, 국민의 구성도 슬라브계-유대계-독일계가 뒤섞인 다문화, 다인종 국가였다. 그러나 2차 대전이 발발하고 독일군과 소련군이 들어오자, 모든 것이 바뀌었다. 나치 점령 당국이 유대계 폴란드인들을 말살하고 뒤이어 들어온 소련군에 의해 독일계 폴란드인들이 소멸되자, 슬라브계가 유일한 생존자가 되었다. 물론 슬라브계도 나치와 소련에게 학살되었지만 유대계와 게르만계에 비하면 나은 편이었으며, 이들이 살아남아 현대 폴란드인을 형성하게 되었다. 또한 정치 이념도 반공주의에서 [[공산주의]]로 바뀌어, 결국 폴란드는 [[동유럽 혁명]]으로 의회민주주의적 자본주의 국가로 복귀할 때까지 소련의 [[위성국]]이 되었다. 또한 소련으로 넘어간 영토는 이후로도 되찾지 못하여 폴란드의 동편 국경이 거의 대부분이 이때 확정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